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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 동양포럼 한국사회에서 인간 존엄을 찾아서 1-2

Writer. 주사랑공동체   /   Data. 2021-01-10   /   Hit. 3171

“코로나 시대 속 ‘존엄성’ 새 기준 정립 필요”

원혜영 충북대학교 윤리교육학과 강사
원혜영 충북대학교 윤리교육학과 강사


[동양일보]


한편, 한국사회는 최근 ‘존엄성’과 ‘인권’에 관련하여 전쟁의 트라우마를 극복한 후에, 국가라는 권력을 통해 인간의 생명을 보호할 수 있다는 관점에서 성장하고 그 너머를 바라보고 있다. 단순히 생명권만이 아니라 편견과 억압이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가를 주목하고 있다. ‘존엄성’이란 이름이 성장한 한국사회에서 다른 차원에서 다른 지점을 바라보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푸코가 “근대정치는 인간의 신체를 정치적 관점으로 정략의 중요한 안건으로 만드는 사회라고 하며, 더 이상 국가와 영토에 대한 통치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통치(bio-politics)로 주권 권력의 문제가 변화하고 있다”라고 하는 말에 방점을 두고자 한다.(신덕용, ‘『미국의 아들』, 『원어민』에 등장하는 비오스와 조에’ 『동서비교문학저널』, 2019, 156.) 이와 마찬가지로 아감벤 역시 ‘영토와 국가를 통한 지배의 방식이 점점 더 인간개개인에 대한 통치의 방식으로 변화’하여 ‘생명 정치화’되었으며, 권력은 그 국민의 생명을 보호할 가능성과 동시에 그것을 대량 몰살할 가능성도 함께 갖게 되었다고 한다. (『호모 사케르』, 37; 신덕용, 위의 책.) 권력이 특정인간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갖는다는 개념은 국가, 영토 그리고 민족의 경계가 엄격하게 분리된 제국주의의 시대와 그 뒤를 이은 폭력의 시대에 비춰보면 일견 타당하지만, 인간개인에 대한 문제로 들어가면 권력이 집결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주권 권력이 ‘생사여탈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억압과 지배의 서열적 구조 속에서 빼앗길 생명이 있는 피지배계층이 있다는 것을 필요조건으로 한다. 그렇다면 한 사회 혹은 다양한 사회에서 혹은 특정의 목적을 위해 작동하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 예를 들어, 종교, 법률, 정치, 그리고 문화 등등은 사적인 영역에서 폭력적 주권국가의 역할을 대신한다고 말할 수 있다. 푸코와 아감벤이 말하는 ‘생사여탈권’이 실제 생명을 빼앗을 수 있는 권리이며, 그 권리의 실제행사와 가능성을 통해 벌거벗은 생명을 생산하는 것이라면, 현대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은 국민과 사회구성원의 생명을 실질적으로 취하지는 않지만, 오히려 이 이데올로기 장치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장치들로 타자의 존재를 비가시적으로 만들고, 사회로부터 격리하여 사회에서 벗어나지도 그렇다고 통합되지도 못하는 ‘호모 사케르’ (homo sacer)를 만든다.(신덕용. 위의 책.) ‘호모 사케르’는 인간을 생명학적인 삶에서만 허락하게 하고,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인 삶을 박탈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인간은 생명학적 삶에만 만족하지 않는다.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삶이 박탈하지 않고 ‘자유로운 삶’을 원한다. 한국사회는 지금 코로나-19로 생명학적인 삶에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도, ‘호모 사케르’에 관련된 논의가 진행 중이다. ‘존엄성’의 기대감을 높게 여기고 추구하는 중이다. 얼마나 빠르게 이런 존엄성의 추구상태로 갈 수 있을까? 많은 난관이 존재한다. 인간은 단순히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민족은 한순간도 사회적 권리가 인정되지 않는 채, 텅 빈 존재로 남아있기를 원하지 않았다. ‘생명은 있으나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인간(zoe)’을 원하지 않는다. 사회적 인간이길 원한다. 접화군생의 대의를 실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기를 바란다. 관계를 통해서 교감하고 친밀한 교류를 통해 공감하는 인간이길 원한다. 한국사회는 ‘존엄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전환에 노출되었으며, 현재 이러한 문제에 봉착해 있다.




최소한에서 생존권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지만, 고대한민족의 전통에서 보인 인간의 존엄성에 관련한 인식은 역사적인 사건들로 인해서 다시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연구자는 존엄성을 자유로운 인간에서부터 시작하고 싶다. 한국사회가 가지고 있는 전통적인 입장인 단군설화를 기초로 하여, 이미 남성 명사형인 ‘호모 리베르(homo liber)’라는 ‘자유인’, 여성 명사형인 ‘언제나 자유로운 사람’으로 ‘셈페라 리브라(semper libra)’를 바탕에 놓고 있다. 환인과 웅녀에서 의해 단군설화를 소급한다. 환인은 ‘호모 리베르,’ 인내를 통해 인간이 되길 희망한 웅녀는 도전에 당당히 맞서는 인물인 ‘셈페라 리브라’이자 한민족의 전통적인 여성상이다. 신자유주의가 도래한 근현대 이후에도, 한국사회에서 여성의 위치는 단군설화의 웅녀만큼이나 획기적이지는 못하지만, 도전적인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한국사회에서 “조직이란 엄격하게 권위와 권력 그리고 성취의 개념 아래 이루어진 것이며, 그 동안 여성은 이 조직의 발전과는 무관한 집단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남성본위로 이루어진 이러한 조직에서 여성들은 ‘이방인’ 또는 ‘주변인’의 위치를 벗어나기 힘들다. 조직의 기본성원인 남성들은 조직 내에서 일어나는 일에 익숙하여 ‘평상대로 생각하면’ 되었다. 그 공동체는 비합리적인 요소, 비논리적인 요소도 있으나 이미 조직에 젖어 있는 이들은 의문 없이 무언의 합의 속에 이런 것들을 지나쳐 버릴 수 있다. 외부에서 온 이방인인 여성들은 ‘평상대로 생각하여 행동하는’ 성원들의 행동에 대해 필연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게 된다. 특히 여성들은 남성들과 다른 전제와 관심을 키워왔을 가능성이 크므로, 더욱 기존의 ‘평상시 행동’이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 부딪혀 여성은 문제를 제기한다. 이제까지 편안하게 일해 온 남성들은 여성이 ‘시끄러운 방해자’로 보여서 협력을 거부하게 된다. ‘권력이 또 다른 권력을 낳는다.’라는 속성을 이해한다면, 뒤에서 밀어주는 세력이 없는 고립된 여성은 자신에게 성공의 기회가 많이 열려 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기회가 막혀있고 현상유지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으니, 방어적이고 조심스러운 운영방식을 취하지 않을 수 없다.”(조혜정, 『한국의 여성과 남성』, 문학과 지성사. 1988. 158-159)

한국사회에서 여성은 이런 방식에 길들어졌다. 다만 여성이 권력의 중심권에서 벗어나지 않기를 원할 때, 더 큰 권력의 지배를 받아 그것에 의지하여 행하는 사례는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여성의 권위와 존엄성을 크게 훼손하는 사건으로 발생할 수 있다. 여성은 권위신장을 위해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비주류의 여성이 유리창을 깨고 권력의 핵심에 진입하고자 하는 과정상에 문제는 여전히 지적된다. 인사권행사에 남성은 여성이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 임용하기보다는 남성자신의 권위를 유지시키기 위한 방패막이, 또는 자신들이 하는 실수를 대신해 줄 수 있는 도구로 사용한다. 한국사회는 전통적으로 유교적인 권위주의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상태이다. 최근 미투운동이 한국사회의 사회적 현상으로 자리하기까지의 여성들의 사회 참여적 정당성은 참혹할 정도로 심각했다. 한국사회에서 편견과 억압은 모든 계층에서 개인과 집단이 대립할 때 심각하다. 여성의 ‘존엄성’을 무시하고 정치적으로 재단하거나 이용하려는 권력집단은 여전히 존재한다. 인간은 여성이건 남성이건 장기판의 말이 될 수 없다. 다른 사람의 원칙을 위해 나 자신의 원칙을 무너뜨리는 것은 일종의 심각한 ‘존엄성’의 침해이다.




또한 핵가족은 생산성에 집착한 산업화과정이다. 특히 가족단위로 임금체계로 특징지어지는 시대의 산물이다. 이러한 제도가 안고 있는 비인간성과 장기적 사회발전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일반적으로 한국사회에서 남편의 역할은 ‘돈벌이 꾼’으로, 아내는 사랑하는 것이 의무화된, 즉 감정을 요리해야 하는 인간이 되어버린 점도 고정된 인식이다. 여기서 도구적 행위와 정서적 행위의 분담으로 나타나는 효율성의 근원적인 차원에 따라, 인간은 성취하고자 하는 욕구와 감정적 유대를 맺고자 하는 욕구를 동시에 갖고 있으므로, 이런 분류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경향성이 서서히 자리하기 시작한다. 또한 이런 영역의 분리는 가장 친밀한 관계를 맺어갈 것이 기대되는 가족성원, 특히 부부가 가정과 사회라는 매우 다른 경험세계에 살게 되니 실제로는 친밀성을 길러나가기가 극히 어려운 상황이다. 남녀를 축으로 가정과 사회가 갈라져 있는 한, 친밀하고 평등한 관계보다는 지배 종속적 관계가 지속될 수밖에 없다는 분석도 있다. 더불어 핵가족의 문제는 쉽게 사회로부터 고립되기에, 사적 비밀이 보장되는 고립된 가족은 바깥세상으로부터 피난처일 수도 있지만, 위협적인 장소 그 자체로 변신할 가능성을 안게 되어, 실제로 핵가족 속을 들여다보면 증오와 폭력과 횡포가 가득하다는 것이 이런 계통의 연구가 밝혀온 주요 내용이다.(조혜정, 위의 책. 183-184) 가족 안에서 존엄성의 훼손과 모순은 단순히 가부장적인 체계 안에서 논할 수 없을 정도로 사회문제가 되었다. 권력을 가지지 못한 여성과 아이는 단순히 모성적인 본능과 가족관계 안에서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했을 때, ’존엄성’은 심하게 침해된다. 분배와 인정은 정당성을 확보하지 않은 채, 사회원리의 주도 아래 형해화되어 있다.

그렇지만, 한국사회는 ‘표준적’ 집단에 들지 못하는 많은 사람의 소외와 고통에 대안을 제시하고자 노력한다. 한국사회는 현재 여성과 아이, 그리고 노인에 대한 ‘존엄성’에 대한 인식의 부족함을 자각하면서, 배려의 대안을 찾고자 한다. 특히 ‘베이비박스’는 미혼모와 아이에 대한 배려로 주목받고 있다. ‘베이비박스’에 아이를 버려두고 가는 미혼모의 사정은 눈물겹다. 아이는 생명을 가진 존재로 ‘존엄’하지만 미혼모에게서 태어났다는 사실로 사회적 억압과 차별로 자유롭지 않다. 이런 사실을 감수하더라도 미혼모의 경제적 상황은 아이와 함께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렵다. 여성개인의 역할과 자유를 인정하는 현대사회에서도 전통적인 유교적 방식은 한국사회의 뿌리에 깊게 존재한다. 여성에게 독립적이고 개방적인 사회적 분위기를 안겨주기에는 시간이 필요한 듯 보인다. 원치 않았던, 혹은 계획에 없었던 아이라도 모성애, 부성애가 있다면 키울 수 있지만, 그것은 의지만으로 되지는 않는다. 모성애가 강하고 아기를 책임질 수 있어도, 부모 인격이 막장이면 가정에서는 좋은 아이가 될지라도 막장으로 자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아이를 문자 그대로 버리게 되면 ‘유기죄’에 해당이 된다. 법의 처벌과 현실적인 양육 불가능성, 그리고 영유아의 안위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베이비박스’이다. ‘베이비박스’는 그 자체로 최후의 보루이다. ‘베이비박스’의 진짜 목적은 아기가 맡겨질 때 얼어 죽지 말라고 만들어졌다고 한다. 21세기의 인간의 존엄성이 다시 후퇴되지 않기 위해 한국사회는 수많은 노력을 한다. 몇몇 방송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무작정 아이를 넣고 간다고 해서 끝나는 것은 아니고, 사실 관리하는 사람들이 지키고 있다가 아이를 유기하고 가는 사람을 쫓아가 최소한의 인적사항을 물어본다고 한다. 최소한 출생일 정도는 알아야 어느 정도 법적절차를 밟을 수 있다. ‘베이비박스’는 마음대로 버리고 갈 수 있는 시스템은 아니다.(나무위키, 베이비박스.) 아이를 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린 여성에 대해서도 다각도의 배려가 필요하다. 베이비박스를 통해 우리는 봉건적 대가족제도의 이상과 유익함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결과를 가져온다. 대가족제도에서 아이는 쉽게 버려지거나 유기될 수 없는 구조를 가졌기 때문이다. 봉건적 대가족제도의 붕괴과정은 경제 구조변화와 밀접하게 관계한다. 자본주의와 산업화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진 생산이 가족 단위에서 대규모로 조직화됨에 따라 개인적 경제적 자립이 가능해졌고 개인적 신분 상승의 기회는 크게 확대되었지만,(조혜정, 위의 책, 181) 여전히 소외 계층인 개인의 ‘존엄성’은 궁극적으로 가족이 아니라, 국가에 의해 보호받아야만 한다는 논리로 전개된다. 현재 한국사회는 소외계층에 관련하여 공감대 및 대안에 적극적이고 철학적인 발전에 힘을 쓰고 있다.

또한 코로나로 재편되는 존엄성의 범위와 한계를 언급하고자 한다. 한민족은 전통적으로 천부경에서 말하는 ‘사람 속에 하늘과 땅이 녹아들어 있어서(人中地天)’ 긴밀하게 유기적으로 서로를 의지하는 자연적 사고관을 가졌다. 인간은 에너지를 가지고 ‘정보’로서의 하늘, ‘질료’로서의 땅을 매개적으로 연결한다. 존엄성을 인간만이 가진 불가침적인 가치에 두고 있는 것은, 또 다른 존재들인 하늘과 땅을 벗하고 있는 자연과 그 자연을 토대로 살아가는 인간의 이기심에 경종을 울린 것이다. 원래 존엄성은 자연물과 대조되는 우월성과 독보적인 존재성에 방점을 찍었다. 하지만 천부경의 원리를 한민족의 존엄성의 원리로 인식하게 되면, 코로나-19 이후에 새로운 시각이 열린다. 천부경에서 인간은 주변의 다양한 세계와 관계하는 위치로 하늘과 땅처럼 훼손되지도 않으며 그 본질 자체로 인정한다. 존엄성은 인간 내부에 존재하는 지위와 신분들로 비교되는 세상과 무관하고 능력과 경험의 차이도 초월한다. 한민족은 그 원리에 충실했지만, 시대의 흐름 속에서 문화 및 문명의 충돌로 본래의 근원에서 벗어나기도 했다. 자신의 몸, 가족, 민족, 그리고 국가라는 시스템에서 존엄성을 바라보는 시각을, 우리는 코로나 시대를 맞이하여, ‘포스트 코로나(Post Corona)’가 아니라 ‘위드 코로나(With Corona)’의 시대로 대비하고자 한다. 자유로운 존재가 존엄성의 근간이 된다고 생각하지만, 공동체의 책임감 역시 존엄성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에 장기적인 가치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코로나19 이후 다시 천부경의 원리를 조명하게 된다. 코로나 이전까지 인간은 이기적이고 낭만적으로 생활했다는 사실을 체감한다. 포스트 휴먼의 다양한 삶에 대한 인정과 분배는 인간사회의 개혁에 의한 것이기보다는 자연적 선택과 도태로 이어질 수 있다. 무한한 겸허함을 인간은 자각한다. 생태계적인 사고관이 인간 세계에 필요하다. 코로나 확진자를 찾는 것에 주안점을 두기보다 코로나로 인한 사망자를 줄이려는 노력이 ‘존엄성’에 가까운 대처이듯이, 세계는 백신과 치료제 중심으로 대안을 찾는다. 집단의 복지나 공동체의 안전을 위해 개인의 희생과 인권의 침해가 코로나 시대에 암묵적으로 인정되었다. 존엄성이 법적이고 정치적인 테두리에 그치지 않기를 바라는 염원은 코로나로 인해서 더욱 제한되기도 하고 방임되기도 한다. 상황과 사건에 의해 유동적이다. 비대면의 시대는 새로운 세상을 열었고 존엄성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대적 숙제를 다른 관점으로 조망하게 한다. 진정한 만남이 아닌 가상의 공간에서 존엄성의 훼손과 방어가 새로운 화두로 떠올랐다. 또한 인간이 인간을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에 관련하여 존엄성은, 생명존중에서부터 시작하여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사회에 대처하는 기준을 따로 정해야만 한다. 우리는 존엄성을 회복하려는 시도와 인간중심에 치중했던 시대를 잠시 멈추고 존엄의 역사를 다시 써야 한다.

 

출처 : 동양일보 이땅의 푸른 깃발(http://www.dynews.co.kr)

원문 : http://www.d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613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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