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이었다. 아니, 어쩌면 운명일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집 앞에 버려진 갓난아기를 마주한 건.
아찔했다. 같은 일이 반복되는 건 비극이다. “버릴 거면, 여기다 두세요.” 고심 끝에 따뜻하고 안락한 공간을 꾸몄다. 국내 최초로 ‘베이비박스’를 운영하는 이종락 목사 얘기다.
아찔했다. 같은 일이 반복되는 건 비극이다. “버릴 거면, 여기다 두세요.” 고심 끝에 따뜻하고 안락한 공간을 꾸몄다. 국내 최초로 ‘베이비박스’를 운영하는 이종락 목사 얘기다.
“어린 여학생인데, 갓난아기를 교회 대문 앞에 놔뒀으니까 잘 보살펴달라네요….”
이종락 목사도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2007년 초봄이었어요. 이를 어쩌나 하다가, 그럴 시간이 어딨어요. 얼른 뛰어나갔죠.”
대문 앞에 놓인 커다란 박스. 어쩐지 비린내가 진동한다 싶었는데 굴비상자였다. 주변에는 들고양이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설마하며 열어봤더니 갓 태어난 아기가 웅크리고 있었다. 참담한 모습에 가슴이 아릿아릿했다.
그해 봄은 유독 추웠다. 반사적으로 들어 안았는데 몸이 매우 찼다. 이미 저체온증이 온 상태. 아가를 집으로 들여다놓은 그날, 이 목사는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그전까지만 해도 저는 장애아 돌봄에 집중하고 있었어요. 이를 계기로 버려진 아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참으로 장소를 가리지 않고 버려지더군요. 화장실에 버려졌고요, 건물 옥상 고무대야에 버려지고, 비닐에 싸인 채 야산에 버려졌어요. 갓 태어난 생명인데, 축복은 받지 못할 수 있지만 그렇게 쓰레기처럼….”
어린 생명이 버려지지 않길. 버릴 거면, 차라리 안전한 곳에 넣어두길. 그런 작은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베이비박스가 생긴 배경이다.
첫 아기, 가슴으로 품은 8백30명
그렇다고 뚝딱 만들어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국내엔 전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체코에서 베이비박스를 운영한다는 곳에 이메일로 자문을 구했습니다. 초반엔 감을 잡기 힘들더군요. 그런데 답이 오지 않았어요. 자체적으로 만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이야 전 세계 19개국에서 베이비박스가 운영된다는 걸 알지만, 당시엔 정보를 얻기가 힘들었다.
2년간 연구한 끝에 2009년 12월, 서울 난곡7동(주사랑공동체교회)에 갓난아기를 위한 작은 공간 15개가 생겼다. 마치 사물함처럼 생겼는데, 칸마다 보온이 된다. 아기가 들어가는 순간 교회에 벨이 울리도록 고안했다.
“베이비박스를 만들고 나서도 이곳에 아기가 들어오는 일이 없도록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벨이 울리지 않도록 해주세요, 여기가 아니면 죽을 수밖에 없는 아이들만 들어오게 해주세요, 라고요.”
베이비박스를 설치한 후로 이 목사는 되레 잠을 설쳤다. 24시간을 긴장 상태로 보내야만 했다. 혹여나 벨이 울릴까봐서다.
동네에 ‘신기한 것’이 생겼다는 소문이 나면서 장난으로 문을 여닫는 사람들 탓에 낮 시간대에는 몇 번 벨이 울린 적이 있다. 그럴 때마다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첫 번째 아기가 들어온 건 3개월이 흐른 뒤였다.
“그날도 대낮이었습니다. 2시 40분. 그냥 열어본 거겠지, 하며 내려갔는데 아이가 들어 있었습니다. 보자마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어요. 정말 엉엉 소리 내며 울었어요. 탯줄도 한 뼘 길이로 달려 있는, 막 태어난 아기가 담겨 있는데…. 그 심정을 어떻게 표현할까요.”
아기를 고이 감싸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사내아이였다. ‘모세’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이후 6년 가까이 흘렀다. 올해 11월 15일 기준, 베이비박스에 들어온 아기는 모두 8백30명.
“교복에 둘둘 말아서 넣어둔 아기, 태반까지 그대로 달고 있는 아기…. 쌍둥이도 다섯 쌍 있었습니다. 아기를 한 칸에 겹쳐 놓은 경우도 있었고요. 한 상자에 세 명의 아기를 넣어둔 경우도 있었습니다. 8백 명의 아기를 본 순간을 다 얘기하려면 일주일은 꼬박 밤을 새워야 할 거예요. 한 명도 잊을 수가 없어요.”
‘영유아 유기시설’ 오명도
이곳을 찾는 엄마들 60% 이상이 10대 미혼모다.
“밤중에 몰래 아기만 놓고 가는 경우도 있지만 ‘딩동’ 소리를 듣고 나간 저와 상담을 나누는 미혼모도 많아요. 베이비박스만 있는 게 아니라 ‘베이비룸’도 있어요. 그곳에서 엄마들은 아이와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상담도 받습니다. 어린 미혼모들은 심리적으로 굉장히 불안한 상태이기 때문에 아기를 놓고 그대로 가버리면 자칫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어요. 그렇기에 심리적인 안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아기를 포기한 엄마들은 죄책감이 상당하다. 모두가 자신을 손가락질할 거라고 여긴다. 그래서 이 목사는 그들에게 따뜻한 말부터 건넨다고 했다. 잘했다, 혼자 외롭게 10개월 동안 아이를 품어줘서 고맙다, 힘들었을 텐데 생명을 없애지 않고 빛을 보게 해줘서 장하다, 라고.
“두어 시간 얘기를 나누다 보면 아기를 키우겠다고 다짐하기도 합니다. 8백여 명 중 약 1백50명이 본인이 키우겠다고 다시 데리고 갔어요. 당장은 키울 상황이 안 되지만 키울 의사가 있다고 하면 후원기관을 통해 분유와 기저귀, 생활비를 1년까지 지원해주고 있습니다.”
몰래 아기만 놓고 가는 엄마 중에도 다시 찾아오는 경우가 있다.
“그렇게 간 사람들은 이내 전화가 와요. 새벽 4~5시에 잔뜩 술에 취해서 꺽꺽대며 웁니다. 우리 아기 잘 있느냐고요. 그러면 시간 내서 찾아오라고 잘 타일러요. 그렇게 다시 아기를 찾아가 기르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면 뿌듯하죠.”
한 달 평균 20~25명. 벨이 울리지 않길 바랐던 당초 바람은 이미 무색해진 듯, 너무도 많은 아이들이 들어오고 있다.
“2012년 8월부터 아기가 들어오는 빈도가 급격히 증가했습니다. 무려 9배나 급증했어요. 웬일인가 했더니, 입양특례법이 실시된 거예요. 출생신고를 해야지만 입양을 보낼 수 있도록 법이 개정된 거죠. 10대 미혼모가, 그 어린 학생들이 몰래 낳은 아기를 출생신고를 하려고 하겠습니까. 입양을 보내고 싶어도 못 보내고, 이곳에 들어오는 아기가 급증한 거죠.”
그렇다 보니 ‘영유아 유기를 조장하는 시설’이라는 오명을 쓰기도 했다.
“제주도에서 16시간 동안 배를 타고 여기까지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주도의 미혼모가 9명이나 다녀갔어요. 굳이 그렇게 먼 길을 온 건 아기를 살리겠다는 거예요. 그건 ‘유기’가 아니죠. 유기는 생명을 생각하지 않고, 아무 데나 버리는 겁니다. 아기 옆에는 정성스레 쓴 편지도 함께 들어 있어요. 물에 빠진 사람은 구하고 봐야지요. 사람 구하는 데 자격증이 필요한 거 아니잖습니까.”
베이비박스와 베이비룸은 개인 및 단체 후원과 자원봉사로만 운영되고 있다. 정부 지원은 없다. 현재 51가구의 생활비와 분유, 기저귀 값을 지원하고 있으며, 오갈 데 없는 미혼모의 자립을 돕기도 한다. 현재 주사랑공동체교회에 머물며 바리스타, 한식조리사 등 자격증 공부를 하고 있는 미혼모는 9명이다.
美 독립영화로 제작, 5백만 관객의 눈물
이 목사의 이야기는 최근 영화화되기도 했다. 미국에서 <드롭박스(Drop Box)>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로 제작돼 지난 5월 개봉했다. 2011년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 이 목사는 단칼에 거부했다고 했다.
“뭐 대단한 일이라고 여기까지 오느냐고 했죠. 그런데 고집스럽게 설득을 하더라고요. 그렇게 몇 달 메일을 주고받은 끝에 한국으로 와 촬영에 들어간 겁니다.”
혼신의 힘을 다한 영화였다. 이 목사는 “감독을 비롯해 모든 촬영팀들이 울면서 영화를 찍더라”고 했다.
진심이 담긴 탓에 첫 필름인 40분짜리 영상은 미국 내 기독교영화제에서 대상을 탔다.
이후 3년간 다시 다듬어져 80분짜리 다큐멘터리 영화로 재탄생했고, 올해 5월 미국 50개 주 8백70개 극장에서 상영됐다. 이틀 만에 매진됐고, 앙코르 상영까지 했다. 무려 5백만 명의 관객이 다녀갔다. 독립영화로는 압도적인 수였다.
“미국 현지에서 메일이 수도 없이 많이 왔어요. 영화를 보고 새 삶을 살게 됐다는 사람이 참 많았습니다. 낙태를 하려고 했는데 영화를 보고 나서 아이를 낳기로 했다, 베이비박스에 들어온 아이를 어떡하면 입양할 수 있느냐, 한국으로 봉사활동을 가겠다 등 고마운 얘기들이었죠. 사형선고를 받은 암 환자가 영화를 보고, 생애 마지막 한 달을 정말 따뜻한 마음으로 살다 간다는 사연도 있었습니다. 믿을 수 없이 많은 사람이 함께 울고, 감동받은 것에 대해 저는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기적 같은 일이죠. 난곡동 베이비박스가 지구 저쪽 사람들을 다시 살게 했다는 것이요.”
시간이 흐를수록 더 많은 사람이 베이비박스를 알게 됐다. 어쩌면 앞으로 더 많은 사람이 벨을 울릴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 목사의 바람에는 아직도 변함이 없다.
“여성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생명을 품고 있을 때입니다. 그들이 더 이상 울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러면 베이비박스의 벨은 더 이상 울리지 않겠죠. 종국에는 이곳의 문을 닫는 게 제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