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언론에 비친 주사랑공동체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제가 태어난 날 아무도 웃지 않았죠_2015-12-23 여성신문
2016 여성신문 신년기획 - 보듬는 사회로 : 외면받는 미혼모 1
4살배기 소원이의 이야기
엄마는 나이 스물에 혼자 소원이(가명, 4살)를 낳아 길렀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여자’와 그 아이라는 이유로, 소원이 모녀의 삶은 초라하고 불안해졌습니다. 신년기획 외면받는 미혼모 첫번째는 소원이의 출생·성장 과정에서 일어난 일들을 소원이의 시점에서 재구성했습니다.
엄마는 서울 동작구의 한 고시원 샤워실에서 혼자 절 낳았어요. 2012년 12월 13일 오후 10시 10분. 몹시 추운 밤이었지요. 엄마는 스무 살이었어요.
엄마는 아빠에게 수차례 전화를 했지만 응답이 없었어요. 아빠는 엄마보다 네 살 많은 대학생이었는데, 엄마가 아르바이트를 하던 카페에서 처음 만나 사귀게 됐지요. 엄마는 교제 3개월 만에 임신했어요. 아빠는 “왜 그렇게 임신이 쉽게 되는거냐. 너 때문에 인생 꼬였다”라며 엄마에게 화를 냈어요. 병원비로 쓰라고 엄마에게 100만원을 준 후, 아빠는 사라졌어요. 몰래 자취방도 옮겼어요. 엄마는 낙태를 생각하고 병원에 갔지만, 초음파 검사 화면에 잡힌 제 조그만 심장이 뛰는 걸 보니 도저히 할 수가 없었대요.
그날 밤 엄마는 저를 피범벅이 된 이불로 둘둘 말아 안고 택시를 탔어요. 할머니네 집 문이 열리자마자 엄마는 탈진해 주저앉아 버렸어요. 할머니는 무척 당황한 듯 했어요. 사실, 할머니와 엄마가 떨어져서 연락도 하지 않고 산 지 2년이 넘었거든요. 엄마는 고등학생이던 2010년 집을 나왔어요. 할아버지가 엄마가 열 살 때 사업 실패 이후 집을 나갔고, 할머니 혼자 가정부, 간호원 등으로 일하면서 생계를 꾸렸어요. 우울증에 알콜중독 증세를 보였던 할머니는 엄마에게 자주 욕설과 험악한 말을 했대요. 아무튼, 엄마를 방으로 옮기고 제 몸을 씻는 동안 할머니는 ‘미친년, 미친년’ 이라고 중얼거렸어요. 저는 힘껏 울음을 터뜨렸어요. 하지만 탯줄을 잘라주는 사람은 없었어요. 저를 안아 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사람도 없었어요. 그날 밤은 아무도 웃지 않았어요.
할머니는 엄마에게 제 출생 신고를 하지 말라고, 입양을 보내던지 버리던지 하라고 했어요. “난 못 키워줘. 너도 앞으로 살날이 얼마나 많은데 애 때문에 망치려고 그러니? 애 아빠도 도망갔는데... 남들 보는 눈이 무서워서 어떻게 살아. 잘 생각해봐.” 엄마는 저를 부둥켜안고 울었어요. “아가야, 엄마가 너무너무 미안해...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너를 포기하지 않을 거야.”
엄마는 전국의 여러 미혼모 시설에 전화를 했어요. 하지만 당장 엄마를 받아주겠다는 곳은 없었어요. 미혼모들이 많아서 시설마다 자리가 부족하기도 했지만, 미혼모 정부지원 신청기간이 최소 한 달은 걸리기 때문에 엄마를 받아주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대요. 엄마는 일단 고시원을 나와 친구의 자취방에 한 달간 신세를 지기로 했어요. 아빠가 준 돈 100만원은 그 동안 제 병원비로 다 써 버렸어요. 필수 6종 검사, 필수 예방접종에다 가끔 제가 고열과 호흡 곤란에 시달리는 바람에 응급실 신세를 졌거든요. 미혼모들을 위해 무료나 저렴한 비용에 진료를 해 주는 보건소와 병원이 있지만 그 때는 경황이 없어서 잘 몰랐대요. 그런 정보를 알려 주는 사람도 없었지요.
돈이 떨어진 엄마는 급히 일자리를 구했지만, 고등학교 중퇴 학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어요. 새벽에는 편의점과 술집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고, 낮에는 저를 돌보며 쪽잠을 잤어요. 저는 반지하 월세방의 공기가 답답해서 호흡 곤란을 자주 일으켰어요. 자다가 깼을 때 엄마가 곁에 없으면 더 크게 울었어요. 옆 방 사람들은 아기 우는 소리가 시끄럽다며 자주 불만을 표시했죠. 곤란해 하는 친구에게 엄마는 “우리가 당장 갈 곳이 어딨어. 조금만 기다려주면 안 될까”라며 눈물로 사정했어요. 그렇게 우리는 엄마 친구들 집을 전전하며 몇 달을 보냈죠.
엄마는 저를 낳은 지 세 달도 되지 않아 건강이 무척 나빠졌어요. 키가 170cm인데 몸무게가 43kg까지 빠졌고, 글씨를 쓰다 보면 손이 떨렸고, 얼굴은 누렇게 변했어요. 길거리에 나가면 아이돌 연습생 아니냐는 말을 들을 만큼 예뻤는데, 오랜만에 본 친구들이 엄마를 몰라볼 정도로 변했어요. 그러면서도 엄마는 제가 잘 못 먹어서 어디가 안 좋지는 않나, 혹시라도 장애가 있는 건 아닌가 늘 걱정했어요.
가끔 엄마는 저와 택시를 타고 서울 관악구 난곡동 주사랑공동체교회로 갔어요. ‘베이비 박스’ 앞에 서서는 한참을 망설였어요. 그러다 결국 발길을 돌렸고, 집에 오면 저를 꼭 안고 울었어요. “소원아, 너는 좋은 곳에서 살게 해 주고 싶은데... 너는 더 좋은 곳에서 사랑받고 살 자격이 있는데 이런 엄마를 만나서 정말 미안하다...”
2013년 4월 엄마는 서울 강북의 한 미혼모 시설에 들어갔어요. 시설에 들어간 이후 엄마는 많이 밝아졌어요. 다른 미혼모들이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아이를 키우는 모습을 보며 자신감이 생긴 것 같아요. 덜 울고, 많이 웃는 엄마를 보면 저도 기뻐서 방긋 방긋 웃게 돼요.
요즘 엄마는 미용 기술 자격증을 따기 위해 학원에 다니고 있어요. 피부관리사 자격증도 취득했어요. 하지만 엄마의 표정이 늘 밝지만은 않아요. 요즘 경기가 나빠서 취업이 어렵고, 물가는 높은데 정부 지원금은 월 10~15만원에 불과해서 먹고 살기가 빠듯하대요. ‘미혼모’라는 편견은 엄마가 사회에 나가서 뭘 하든지 걸림돌이 될 거래요. 보통 미혼모들은 입소 2년 이내에 시설을 나가요. 내년 4월이면 엄마와 저도 여기서 나가 새 보금자리를 찾아야 할 것 같아요. 엄마가 내년에 자립할 수 있을까요? 아빠는 우리가 보고 싶지 않은 걸까요? 엄마와 저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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