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가희(가명·여·20)씨는 지난 24일 서울 관악구 주사랑공동체교회 이종락(62) 담임목사를 찾았다. 최근 아기를 출산한 미혼모 김씨는 “아기 출생신고부터 하자”는 이 목사의 설득에 자꾸만 말끝을 흐렸다. 이 교회는 ‘베이비박스(영아 임시보호소)’를 운영하는 곳으로, 아기를 키울 형편이 안 되는 부모들이 비교적 안전한 방법으로 아이를 입양기관 또는 보육시설로 보내도록 알선하고 있다.
상담과정에서 김씨는 “아기를 키울 형편도 안 되고 주변 가족들이 출산사실도 모른다”며 “아이를 집에서 낳아 출생증명서도 없다”고 털어놨다. 이 목사가 “법이 개정돼 병원 발행 출생증명서가 없으면 부모가 직접 법원에 출두해 친자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고 하자 그는 완강하게 “법원엔 절대 갈 수 없다”고 답했다. 김씨는 “아이를 좋은 양부모에게 입양토록 해 달라”고 부탁하면서도 이 목사가 “그러려면 반드시 출생신고를 해야 호적이 생기고 입양도 가능해진다”고 하자 “차라리 출생신고를 안 하는 방법을 택하겠다”고 막무가내였다.
버려지고 이름도 없는 아기들
최근 들어 김씨의 아기처럼 버려진 뒤 출생신고조차 못하는 일이 급증하고 있다. 지난달 30일 개정된 가족관계등록법이 시행된 이후부터다. 바로 개정 전 법률에서는 가능했던 ‘인우보증’에 의한 출생신고제가 폐지됐기 때문이다. 병원이 발행하는 출생증명서 또는 부모 또는 부모 중 한 명의 친자확인에 의해서만 출생신고가 가능하도록 관련 조항을 대폭 강화하면서 미혼모들이 자녀의 호적 등록을 아예 포기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는 것이다.
2009년 베이비박스를 국내 처음으로 설치한 주사랑공동체교회의 경우 이달 들어 베이비박스를 통해 맡겨진 아기들의 70% 정도가 출생신고가 불가능해 무적자 상태로 방치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목사는 “25명의 미혼모가 아기를 버리고 갔는데 이 아기들 중 15명이 출생신고도 못한 채 보육시설로 이동하는 실정”이라며 “이들은 보육시설에 가서도 주민등록번호도 없고 호적상 본명도 없이 지내야 한다”고 전했다.
미혼모가 버린 아기의 출생신고를 꺼리는 것은 자신의 호적에 출산사실이 기입돼 장래 신분상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개인의 프라이버시에 해당하는 사안이 아무리 주민등록 등·초본에 노출되지 않고, 제3자 열람이 금지된다 해도 이들은 임신 사실부터 숨기기에 급급한 게 현실이다. 결국 미혼모들의 이기심과 관련법의 ‘비의도적’ 강화 규정으로 인해 출생신고도 없이 버려진 아기들은 합법적 방법을 통한 국내외 입양이 사실상 불가능해지게 된다.
줄지 않는 영아 유기, 저조한 입양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12년 입양특례법 시행 이후 전국의 베이비박스 이용건수는 2013년 252건, 2014년 280건, 2015년 280건, 2016년 278건으로 줄지 않고 있다. 올해도 연말까지 270건을 넘길 전망이다.
입양특례법이 양자를 입양하는 부모의 자격을 크게 강화하자 미혼모들이 가족 몰래 출산한 아기를 ‘더 안심하고’ 버릴 수 있게 만들었다면, 개정된 가족관계등록법은 버려진 아기들의 출생신고를 봉쇄해 입양 기회를 박탈할 수 있다는 게 법률 전문가와 입양기관 관계자들의 우려다. 버려지는 아기들 입장에선 버려지는 것도 서러운데 이름조차 갖지 못한 채 입양되지도 못하게 된 셈이다. ‘엎친 데 덮친 격’이다.
이 목사는 “출생신고 제도를 강화한다고 모든 아동의 출생신고가 빠짐없이 이뤄지는 건 아니다”며 “되레 미혼모들에게 출생신고를 할 수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게 만들어 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입양허가제와 출생신고 의무화, 출생 7일 후 입양동의 효력 인정, 가정법원 확인 등을 특징으로 하는 현행 법규는 출산사실 노출을 꺼리는 청소년 미혼모들로 하여금 입양마저 꺼리게 만든다”며 “아동의 복리증진과 친모의 자기결정권 보호를 위해 출생신고 요건을 완화해야 한다”고 했다.
따라서 미혼모 등 특별한 경우에 한해 부모와 아기의 관계를 사법·행정기관에 밝히지 않고도 해당 유아의 출생신고를 가능하게 해주는 익명출산제 도입이 필요하다고 이 목사는 주장했다.
글·사진=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
이종락 주사랑공동체교회 담임목사가 지난 23일 서울 관악구 난곡로 이 교회 앞에 비치된 베이비박스에서 버려진 아기를 조심스레 꺼내고 있다.